이름: 한억만 (ponam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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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혼수  

사는 것과 죽는 일 헤겔은 결혼을 ‘인륜적 관계’라고 정의했고, 칸트는 ‘시민사회의 계약관계’로 보았다. 일반적으론 결혼은 사랑의 감정에 빠져야 가능하다고 본다. 결혼은 이상과 같은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사랑과 신뢰를 토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관계를 사회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2019년 통계로 월간 2만 3,100건이 결혼을 한다. 하지만 생산과 소비의 주체인 인구가 감소세로 접어들면서 출생과 결혼은 역대 최저를 기록하여 월 2만 건도 곧 무너질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과정을 지나 어렵게 결혼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산 너무 산 이라고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은 쉽지가 않다. 먼저 결혼 평균비용이 2억 3000만원이 되다보니 갑부가 아닌 이상 결혼 자체가 부담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 72%는 신혼집 마련하고 나머지 평균 비용이 2018년 통계로 6,294만원이 나왔다. 이런 연유인지 결혼무용론이 5년 전에 10명 중 4명이었는데 지금은 10명 중 6명이 되면서 상승 폭이 가파르다. 이러다보니 사랑조차 부익부 빈익빈이 된 상황이다. 최근 어느 자료에 보니 소득에 따라 연애도 갈리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격차는 결혼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유무로 사랑이 교차하는 셈이다. 이제는 결혼도 좋아한다는 감정보다는 현실적인 재무제표가 우선이 되 버렸다. 그런데 2,000년 전에 돈에 구애받지 않았던 결혼이 고구려에 있었다. 예물은 고작 돼지고기와 술이었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보낼 때 다른 예물도 함께 보내면 신부 집에서는 딸을 파는 것으로 생각하여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검소하고 소박했던 그들의 혼례에도 한 가지 예외인 혼수가 있었다. 그것은 부부가 마지막 가는 길에 입고 갈 수의(壽衣)였다. 왜 이런 전통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고구려만의 독특한 환경이 그런 혼수를 요구하게 했다. 고구려는 강원도처럼 땅도 척박하고 산세도 깊고 험해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그들만의 생존법이란 고기잡이와 사냥 그리고 약탈경제 곧 전쟁이었다. 천하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기상은 이렇듯 식량과 노동력 확보를 위해 목숨 걸고 전쟁하다보니 어느 덧 전쟁은 그들에겐 일상이 되었다. 전쟁은 수많은 전사자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특별한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바로 혼인을 할 때 아무리 가난해도 장사지낼 때 입을 수의(壽衣)를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결혼은 분명 두 사람에겐 새로운 시작이기에 가장 기쁜 날임에도 수의를 만들었던 그들에겐 이미 삶과 죽음을 하나로 봤기에 그들은 장사지낼 때 춤을 추며 풍악을 울리며 사자(死者)를 떠날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생물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여러 화학적인 요소로 말할 수 있지만 인간의 욕구는 그러한 외적요소들을 무시한 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이성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더 한심스럽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면서 비이성적인으로 살 때가 많기에 이중적인 모습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보다 더 혼동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학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인간이란 헬라어로 ‘위를 바라보는 존재’로 규정한다. 땅에서는 답이 안 나오기에. 비록 땅에 있어도 하늘을 바라봐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하늘을 본다는 의미는 인간은 육신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 있기에 살아 있을 때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두렵지 않고 부끄럽지 않는 인생을 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고대왕국 때 왕의 이름은 사후(死後)에 결정되었다. 그래서 왕의 이름은 그에 대한 진솔한 평가가 되었다. 우린 ‘의자왕’하면 무조건 방탕한 군주로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눈 여겨 보라. ‘의자(義慈)왕’ 그는 의롭고 자비로운 왕이었다. 그럼에도 우린 역사적 근거도 없이 그를 서슴없이 나쁘게만 매도해왔다. 이것이 바로 허구가 진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식민사관의 그릇된 인식이다. 하지만 땅에서는 ‘의자왕’처럼 잘못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해도 하늘에서는 그 누구라도 이런 오해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죽음은 땅의 이름과 상관없이 그냥 내가 뿌린 대로 거두는 예식의 출발점이 된다. 요즘 들어 나는 지인들로부터 인생의 무력감과 무상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그 때마다 나는 과연 마지막 그 날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르트르는 누구보다도 생의 자유와 행복을 갈파했던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죽을 때, ‘내가 돌아갈 고향이 어디 있는가?’를 부르짖으며 눈을 감지 못했다. 왜 죽는가 하는 물음은 왜 사는가 하는 물음과 같으므로,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만 한다. 인생에서 ‘생노병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잘 산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의 한계를 알고 비록 제한적인 삶이라 할지라도 늘 영혼의 고향을 사모하며 나그네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그네와 방랑자는 유사한 것 같지만 목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노숙자와 같은 방랑자는 삶의 목적이나 방향이 없기에 누가 유혹하든 쉽게 넘어가고 작은 난관 앞에서도 쉽게 포기해 버리지만, 나그네는 본향을 향한 분명한 목적지(目的地)가 있기에 어떠한 시험이나 유혹 앞에서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정진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나그네는 많은 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많은 소유는 짐이 되어 발걸음도 무겁게 하지만 그것보다도 짐이 많으면 목적지에 가기가 힘들다. 우리 인생에서 재물이나 명예도 큰 짐이지만 그 중에서도 소유가 가장 무거운 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도취되어 영혼의 고향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땅강아지처럼 땅 냄새 풍기며 살아가는 자가 얼마나 많던가. 수의(壽衣)는 죽을 때 입으면 이미 늦는다. 지금 나그네처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자체가 수의를 입고 사는 일이다. 나그네는 유목민과 같이 불규칙적으로 이동하며 살아가기에 정착민보다 몇 배 더 위험과 유혹에 노출 되어 있으므로 서로 화합하며 하나가 되지 않고는 삶의 질을 떠나서 존재조차 어려운 것이 나그네 삶이다. 하나 됨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판단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들어주며 격려해주는 섬김이다. 그들이 진정한 나의 수의(壽衣)라는 것을 아는 자는 고구려인처럼 사는 것과 죽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2019년 8월 30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올립니다. 사진허락작가:하누리님, 이요셉님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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